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말에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영 비위가 상한다.
1992년 8월 1일 세상에 나온 양귀자의 장편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양귀자 최대의 화제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당시 90년대 페미니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스토리 자체가 파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명배우를 납치해서 길들이는 내용 정도? 그럼에도 이 소설이 화제가 된 이유는 보통 남자 역이었던 사이코패스의 성별을 반전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뿐이다. 남자가 사이코패스인 소설이 과연 주목받을 수 있을까? 그저 그런 평범한 소설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주인공 '강민주'가 여자였고 돈이 많고 능력이 출중하며 이성적이며 그럼에도 가슴속 낭만이 있기에... 여자에게 금지되었던 것 모든 것을 강민주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책 줄거리
강민주는 돈도 많고 부동산도 많은 부자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본투비 천재다. 대문자 T로 굉장히 이성적이다. 현재 여성 상담소에서 상담원 직을 갖고 있다. 이 부자 강민주가 굳이 일을 하는 이유는 아주 목적지향적이다. 그녀는 대학원생으로 여성의 심리, 특히 고통에 대응하는 여성 특유의 폐쇄적인 정신 분석을 논문의 주제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상담소에 경제적 지원을 해주면서 일까지 맡아 하는 중이다.
그녀는 항상 계획을 세운다. 많은 계획 속에 지금 강민주의 계획 중 가장 자극적인 계획은 '백승하 납치'다.
나는 고요히 길을 열어준다. 남기는 뚜벅뚜벅 걸어가 사내를 거실의 소파에 눕힌다. 불빛에 환하게 드러나는 창백한 남자의 얼굴.
백승하.
오느라고 수고했다, 백승하.
_침몰하는 여행의 시작
그녀는 이성적이다. 늘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모든 행동은 이성적 판단 아래 행해지며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다.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고 친절하다.
"그래, 일단은 그렇게 막아보라고. 패배의 순간까지 너도 죽기 살기로 덤벼보란 말이야."
나는 있는 힘껏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낮게 외친다.
...
이어서 내 몸의 기를 모은 심상치 않은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
나는 쓰러지는 백승하를 향해 마지막으로 짧으나 굵은 발길질을 선물한다.
강민주는 백승하를 납치해서 길들인다. 친절하게 또는 폭력적으로 마치 남성들이 자기 부인을 학대하는 것처럼 백승하를 길들인다. 폭력 속에서도 강민주를 절대적으로 의지하게끔 만든다. 강민주가 백승하를 납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백승하 납치 이유
나는 백승하를 싫어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 그를 증오한다.
여자들을 교란한 죄,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게 한 죄, 자신이 택한 남자가 나빴던 것은 자신의 숙명이라고 여기며 여자들을 운명주의에 빠뜨린 죄. 그것만으로도 나는 백승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백승하는 여성들이 가장 호감으로 느끼는 대한민국 남자 배우다. 또한 여성들이 자신의 배우자로 원하는 남성상 1위다. 백승하를 납치한 이유는 여자들을 교란한 죄다. 강민주는 남성들이 강탈해 간 권력을 되찾고 싶다. 지배할 줄 밖에 모르는 남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백승하를 납치해서 백승하를 지배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사회에 보여주고 싶다.
넓은 바다에 잉크 한방울을 떨어뜨린다. 강민주는 굳건하게 이어져온 남성중심사회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린다. 잉크는 희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강민주는 작은 한 방울이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알고 있다. 본인이 단순히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인간들의 삶에 살아가는 것이 태어남의 목적이 아닌 것을 안다. 그녀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왔다. 유년시절 그녀는 쉽게 더러워져 금기시되는 흰옷을 그녀의 어머니는 즐겨 입혔다. 흰옷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늘 자신의 생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임무가 있음을 안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하나의 시작을 보여 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반을 이루었다.
_강민주의 노트에서
그녀의 남자들, 백승하-황남기-김연수
절대자적인 그녀 주변에는 3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강민주가 길들이는 남자 백승하, 강민주가 길들인 남자 황남기, 그리고 강민주를 열받게 하는 하남자 김연수가 있다.
- 백승하: 유명배우이며 행복한 결혼 생활과 배우 생활을 한다. 남자 중 가장 상위계급이라 할 수 있으나 납치 감금 후 강민주에게 길들여진다.
내 어머니가 나의 아버지와 우리 형제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가를. 그래도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소. 몹시 그리워하기는 했지만. 그리워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그리워한 대가가 바로 이런 것이었소?
_백승하
- 황남기: 강민주와 동갑이지만 강민주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강민주를 절대자라 믿으며 따른다. 동시에 그녀를 사랑한다.
"날 사랑하지마. 그건 너의 불행이야. 알겠니? 넌 내 울타리야. 너는 나의 형제야.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야. 운명을 거역하지 마. 날 사랑하지도 마."
_강민주가 황남기에게
- 김연수: 그녀의 남자들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넣는다. 접근금지 처분을 내려주고 싶을 만큼 짜증 나는 인물이다. 현실에는 백승하, 황남기 같은 남자는 잘 없다..^^.. 다만 김연수 같은 인간은 차고 넘친다.
"내가 당신을 벌레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태도 깨닫지 못하는 그 아둔함이나 반성하세요.
...
또 내 전화기 녹음테이프를 그 지저분한 목소리로 더렵혔다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당신 같은 쓰레기는 트럭으로 몰려와도 얼마든지 청소할 자신이 있으니까."
_강민주가 김인수에게
솔직 리뷰
나는 이 소설이 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투쟁의 교과서이자 변증법의 소설화다. 강민주는 낡은 것을 거부한다. 과거의 고여진 모든 것들을 반대하고 투쟁한다. 많은 투쟁의 역사 속에서 양귀자는 '여성'이라는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페미니즘 소설이라며 홍보하며 남자들이 이 책을 보겠는가? 이 책의 가치는 여성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내가 느끼는 불합리에 순응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투쟁해라. 강민주는 우리를 응원한다. 개인의 투쟁이 아니라 함께 투쟁하자고.. 세상의 불합리에 함께 하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성의 대결이나 성의 우월을 가리기 위해 이 소설이 쓰인 것은 아니다.
...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_양귀자 작가노트
이 소설의 단점은 마지막 해설에 있다. 진형준이라는 문학평론가의 해설이다. 읽지 마세요. 읽을 가치가 없습니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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