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세상이 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게 있다. '사랑'이다. 절망 끝에 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리라. 극단적 폭력상황에서도 섬세한 감정 묘사가 이어지며 책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잔잔한 울림을 준다.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으므로 나는 여전히 지금도 의문투성이로 책을 생각하고 있다. 해피엔딩? 새드엔딩? 그건 독자의 몫인가?
해가 지는 곳으로 등장인물 및 줄거리
도리: 미소를 지키는 미소의 언니이자 오로지 생존이 목적을 갖고 있다.
지나: 가족과 함께 희망을 찾아 떠나며 낭만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건지: 지나와 이웃사촌
미소: 도리의 동생
류: 서른 아홉, 기괴한 바이러스로 무정부 상태가 된 한국을 떠나 가족과 함께 대륙을 헤맨다.
해민: 류의 아들
해림: 류의 딸이자 열한 살에 전염병으로 갑작스럽게 죽는다.
단: 류의 남편
지나의 가족: 커다란 탑차에서 함께 살아간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절망의 상황이 왔을 때 나를 살리는 것은 식량도 안락한 집도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쉽기도 하지만 어렵게 느끼는 감정, '사랑'이 절망 끝에 선 사람을 살리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미소와 함께 산다'라는 목적하나로 한국에서 넓은 대륙인 러시아로 넘어온 도리. 도리는 하나의 목적만 가질 뿐 다른 감정은 사치라 생각했다. 미움도 생존 앞에선 사치일 뿐 오로지 '살아야 한다'가 가장 중요하다.
도리와 지나는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도리와 미소는 그렇게 지나의 가족과 함께 러시아를 횡단한다. 해가 지는 곳으로 가면 있을 수도 있는 어떤 희망을 찾기 위해서...
가장 큰 불행은 내게서 늘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고 나는 정신병자처럼 그것을 내내 주시하고 있을 뿐. 그러다 홀로 골똘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는가. 불행을 부르는 주문을 외우듯, 마치 그것에 익숙해지려는 사람처럼.
...
내가 매일 보는 광경이 바로 나의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만큼 무서운 건, 평생 그런 것을 보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다.
...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기적이면서도 기적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
도리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자신의 경계를 지킨다. 단지 생존을 위해서 지나 가족과 함께 다닐 뿐 그들의 커뮤니티에 끼어들 수 없음을 잘 알며 없는 듯 지낸다. 반면에 지나는 도리와 다르다. 지나는 웃는다. 이렇게 망한 세상에서 조차 지나는 지금 이 순간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 지나는 자꾸 균열을 냈다.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어쩌면 도리가 지나를 사랑하는 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만난 그들은 반드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어 보였다. 서로를 위해 존재하듯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들은 망한 세상에서 사랑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둠 속에서 총을 든 자들이 나타났다. 엉망진창이 되자 지나의 아빠는 도리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도리는 버려진다. 그리고 도리는 미소와 함께 떠난다. 살기 위해서...
지나.
도리가 나를 불렀다.
나랑 같이 갈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검고 작은 두 그림자가 커다란 침엽수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도리와 지나는 그렇게 헤어진다.
해가 지는 곳으로 결말
지나
거기 도리가 있었다.
도리
거기 지나가 있었다.
무정부 상태의 러시아 역시 각종 무장세력이 판을 치고 있었다. 지나와 도리 역시 각각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같은 무장세력에게 잡혀 다시 만나게 된다. 다시 만나고 싶지만 이 지옥에서 영원히 만나지 않기를, 더 멀리 더 먼 곳으로 가길 바랐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류
두 사람은 동시에 마음으로 100을 세고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보고 100을 세며 참았을 것이다. 100이 지나서도 눈앞의 사람이 사라지지 않아서, 환상이 아니라서, 하지만 다가가면 환상이 될까 봐 발을 떼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는지도.
어느 새벽, 굉음이 터지고 땅이 흔들리고 전차와 트럭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살기 위해 도망친다. 어디론가... 아마 해가지는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류는 단과 무난하고 뻔한 인생을 살아왔다. 너무 뻔해서 사랑도 이젠 없다 믿었다. 그러나 류는 어딘가에 있을 단을 구하기 위해 돌아간다. 무난하고 뻔한 인생을 살아온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사랑에 헌신하기 위해 류는 해민과 함께 단을 구하러 간다.
결말은 이미 맨 앞장에 나와있다.
해민은 바르샤바에 산다. 해민의 아내는 얼마 전 네 번째 아이를 낳았다.
...
나는 이제 일흔 살이 넘었고, 아니, 여든 살인가, 모르겠다.
너무 오래 살았다. 살아온 세월에 비한다면 러시아에서 보낸 두어 달은 100마리 양 중 한 마리만큼도 아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재앙이 두어 달로 끝이 났다. 건지는 따뜻한 해변에서 도리와 지나를 떠올린다. 미소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도리와 지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사랑하며 살아가고 소소한 하루를 보낼까? 아니면 유령일까?
류가 살아남은 것을 보니 단을 찾기 위해 되돌아간 단과 해민은 생존하였고 도리와 지나, 미소는 폭격으로 세상을 떠도는 유령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지극히 내 생각)
해가 지는 곳으로 솔직 리뷰
책장에 언제산지 기억나지 않은 책이 꽂혀있었다. 아포칼립스물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는 코로나19 상황이 떠오르며 책에 깊이 빠져들었다. 스토리가 풍부하진 않다. 그럼에도 책에 빠져버린 이유는 문체가 좋다. 문장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다 읽고 책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니 <구의 증명>을 쓴 작가였다. 구의 증명도 너무 좋았는데 역시 작가의 솜씨는 어딜 가지 않는구나. 작가는 망한 사랑은 아주 기가 차도록 잘 쓴다. 그래서 너무 먹먹하고 슬프다. 남의 일인데 이렇게 슬픔이 전해지기 정말 어려운데 최지영 작가의 글을 남의 사랑도 먹먹하게 전해진다.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나도 책을 떠올릴 때 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사랑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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